제가 비타민-C를 처음으로 직접 만난 것은 11년 전 진주에서의 일입니다. 얼마 안되는 삶이지만 40여 년의 평생을 늘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셔서 든든하다는 생각으로 살아 왔는데 진주에서의 삶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얘기하려고 합니다.

저는 1982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년간의 인턴생활을 마친 후에 서울의대 해부학교실에서 조교로서 4년간 근무하였습니다. 대개의 경우가 그러한데 조교를 하면서 의학박사학위를 위한 과정을 마치게 되고 그 과정이 끝나면 군의관으로서 병역의무에 임하게 됩니다.

그 당시를 돌아보면 제가 의과대학에 재학하고 있을 때 이미 군의관 요원이 너무 많아서 잉여 요원을 보건복지부(그 당시에는 보건사회부)로 넘겨 의료시설이 없는 무의지역에 근무할 수 있는 공중보건의로서 병역의무를 대신하게 하는 제도가 자리잡아 있었습니다. 필자도 학위과정을 모두 마치고 군의관으로 입대를 해야 하는데 그 당시만 해도 저처럼 기초의학을 전공한 경우 공중보건의로 빠지기 어렵고 거의 대부분이 현역 군인으로서 병역의무를 마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다는 서울의대를 나왔고 학위를 가진 전문 요원이기 때문에 군을 담당하는 국방부로서는 공중보건의로 넘겨 줄 아무런 이유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나이 서른이 넘어서 받는 신병훈련(비록 장교후보생이라 하더라도)은 고되기 짝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그리움이 사무치는 시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 하면 쥐꼬리만한 봉급이었지만 장교후보생이라 하여 훈련기간중에도 약간의 봉급이 지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먹고 자고 입는 것 일체를 제공해 주면서 체력단련 훈련을 전적으로 공짜로 받은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당시만큼 체력이 좋았던 때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100km 행군, 야간 유격행군, 사격, 유격훈련 및 PT체조, 지루하기만 했던 제식훈련, 각개전투 등 3개월 내내 체력이 단련될 수밖에 없는 일정이었던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건강에 운동이 좋다 하여 비싼 돈 들여 헬스센터에 등록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이야말로 꿈같은 시절이었음에도 결코 만족해 하지 못했었음을 지금 새삼스레 돌이키게 됩니다. 인간은 영원히 어떠한 조건에도 자기의 현실에 만족할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를 일이란 생각이 듭니다.

훈련을 마치고 대위로 임관하기 위해 대구에 있는 군의학교로 돌아왔을 때 집으로부터 받은 소식은 아무리 알아봐도 현역군인 명단에는 내 이름이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기 때문에 그저 잘못 확인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국 알고 보니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하게 현역에서 제외되어 공중보건의로 편성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벌써 서울의대 해부학교실 주임교수에게는 보사부의 관계공무원이 해부학을 전공한 이왕재가 공중보건요원이 되었는데 일선 병원에는 보낼 곳이 없어서 대학으로 배치할 생각인데 어느 대학에 배치했으면 좋겠냐는 요지의 질의가 왔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들께서는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 당시의 실상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러한 일련의 조처는 천지가 개벽을 할 일이었습니다. 우선 기초의학 전공 공중보건의를 자기 전공대로 대학에 배치하는 것은 그 당시로는 전무후무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관행으로는 비록 기초의학을 전공하였더라도 일단은 의사이기 때문에 공중보건지소에 근무케 하여 무의지역민의 감기나 소화기 질환 등 일차진료를 담당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공을 살려서 대학에 근무케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개는 공중보건의사들을 배치하는 보사부의 관료가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해부학을 전공했다고 하면 병원의 병리과에서 일할 수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학교로 배치되기는 어려운 현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결국 신생 의과대학인 진주의 국립경상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교실에 발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면의 이야기를 알아본즉 필자가 군의관 훈련을 막 마친 그 때에 서울의대 출신 보사부 공무원 한 분이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공중보건의를 배치하는 일(지역의료과)을 맡게 되어 부분적이나마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인력배치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국가적으로 볼 때도 해부학을 전공하고 그것도 10년 이상 전공을 위해 훈련된 인력을 보건지소에서 감기약이나 처방하게 하는 것보다 의과대학의 해부학교실에 배치하여 강의하고 연구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능률적입니까? 저를 통해서 만들어진 전례는 그 후 후배들에게 좋은 선례가 되어 고급인력의 합리적 관리에 의한 국익을 도모하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없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돌아보건대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셨던 것입니다.

제가 공중보건의 자격으로 국립 경상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근무할 때의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필자가 처음으로 공중보건의로서 의과대학에 배치되었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자세히 언급되었는데 사실 그 당시는 여러 개의 신설 의과대학이 기초의학을 전공하는 사람을 찾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즉, 기초의학을 전공한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신설 의과대학들로서는 상당히 인력확보에 어려움이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로부터 시작되어 상당히 오랜 기간 필자는 신설 의과대학의 보직자들로부터 전화 및 면담요청을 많이 받았는데 내용인즉 어떻게 하면 기초의학 전공의가 현역군인으로 차출되지 않고 공중보건의로 갈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의과대학으로 배치를 받을 수 있느냐 그 비결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돈이 필요하다면 돈을 쓸 수도 있다는 필사적인 태도에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실상 저에게는 어떠한 세상적 비결도 없고 힘을 쓴 일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해법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되는 다그침에 저는 비결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내 빽은 하나님입니다.’ 라는 답을 그들에게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 말을 믿지 않고 계속해서 찾아오고 전화를 했던 기억은 이제껏 새롭기만 합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진주에서의 삶은 필자와 비타민-C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경상의대 미생물학교실의 주임교수로 재직중이던 이광호 교수는 저의 의대 선배로서 본래 서울의대에서 미생물학을 전공하고 전임교수로 발령까지 받았지만 고향이 진주인 관계로 서울대라는 명예를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온 좀 특이한 분이었습니다. 필자가 진주에서 생활을 시작할 무렵 벌써 미생물학교실을 중심으로 비타민-C 열풍은 불고 있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이광호 선생의 세미나를 듣게 되었고 그것이 비타민-C가 나의 일부가 되는 시작이요 운명적 만남의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돌아보건대 현역 군인에서 공중보건의로 배치되게 하신 것도 고마운데 보건지소에서 3년간 거의 무의미한 세월을 보내게 하지 않으시고 필자의 전공에 전념할 수 있게 의과대학으로 배치되게 하여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도움이 되게 하셨고 게다가 비타민-C와의 만남까지 의도하셨음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저와 늘 함께 하시며 저의 앞날을 예비해 오셨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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